청우 박충모(朴忠模, 1894년 5월 17일 원주 ~ 1978년 1월 12일)
구한말 함경도지방의 지주 박민훈옹의 장남이시다. 고향 북청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계속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후 강원도공의로서 인제 원주등지에서 근무하였다. 인제 대홍수로 이천여 이재민이 발생하자 무료 진료, 인제 부흥기성회를 조직하여 인제읍 시가지 이전을 추진하였으며, 원주 공의로 임명되셨을 때는 인제 주민들이 절대 반대 운동을 일으키며, 도 당국에 진정원을 제출한 일화가 있다. 원주 공의로 근무하시며, 충무공유적보존회 모금과 성금하는 등 지역에서의 명망이 자자했다.
박충모 선생은 선천적으로 준재형 특히 의전 지원당시 치열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합격했다. 거기다가 정의감에는 수화를 불사하는 지사다운데다가 역연하다. 의전불합격시에는 자살해버린다는 비장한 각오로 응시했다는 청소년 시절의 의기를 보아도 알수 있다. 의사로서 첫 배치처가 강원도, 평생을 헌신한 연고지로 정착한 셈이다.
1933년 삼산병원을 인수하여, 원주에서 최초로 의료사업을 시작한 한국인이다. 1945년 해방후 한민당에 입당하여, 신익희, 조병옥과 같이 건국운동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원주 시의원, 강원도의회 의장, 재선 국회의원, 강원도민주당위원장 국회보사분과위원장, 국방분과위원장 등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삼산의원 개설 사십오년년간에 직접적으로 극빈한 환자를 무료치료한 수만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다가 왕년 자유당천하에 민주당의 기치을 내세우고 고군분투하던 박충모 선생의 모습에 민중은 동정을 발휘하여 두차례 입후보에도 무난히 당선시켰다. 한번 옳다고 단정하면 기여코 관철하고 마는 의지가 박충모 선생의 매력이다. 가도릭교의 독실한 신자요 별로 물욕이 없고 바둑을 즐긴다는 박충모 선생은 세상에 나왔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앞장서서 다 해 본 셈이다. 516혁명후 정계에서 물러선 박충모 선생은 다시 의료계로 돌아와 조용한 시료에 열중하였으며, 건국공로훈장을 수훈받으셨으며, 묘소는 단계동 무상골에 있다.
박충모 선생은 선천적으로 준재형 특히 의전 지원당시 치열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합격했다. 거기다가 정의감에는 수화를 불사하는 지사다운데다가 역연하다. 의전불합격시에는 자살해버린다는 비장한 각오로 응시했다는 청소년 시절의 의기를 보아도 알수 있다. 의사로서 첫 배치처가 강원도, 평생을 헌신한 연고지로 정착한 셈이다.
1933년 삼산병원을 인수하여, 원주에서 최초로 의료사업을 시작한 한국인이다. 1945년 해방후 한민당에 입당하여, 신익희, 조병옥과 같이 건국운동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원주 시의원, 강원도의회 의장, 재선 국회의원, 강원도민주당위원장 국회보사분과위원장, 국방분과위원장 등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삼산의원 개설 사십오년년간에 직접적으로 극빈한 환자를 무료치료한 수만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다가 왕년 자유당천하에 민주당의 기치을 내세우고 고군분투하던 박충모 선생의 모습에 민중은 동정을 발휘하여 두차례 입후보에도 무난히 당선시켰다. 한번 옳다고 단정하면 기여코 관철하고 마는 의지가 박충모 선생의 매력이다. 가도릭교의 독실한 신자요 별로 물욕이 없고 바둑을 즐긴다는 박충모 선생은 세상에 나왔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앞장서서 다 해 본 셈이다. 516혁명후 정계에서 물러선 박충모 선생은 다시 의료계로 돌아와 조용한 시료에 열중하였으며, 건국공로훈장을 수훈받으셨으며, 묘소는 단계동 무상골에 있다.
*출처: 원주시 50년사 편찬위원회 (1955~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