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 박충모(朴忠模, 1894년 5월 17일 원주 ~ 1978년 1월 12일)
마산사태 진상규명
◇ 마산에 내려가서 사건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온 민주당 박충모 의원은 26일 상오 국회 기자실을 찾아와서 기가막힌 애화 몇 토막을 전했다. 『어떤 16세 되는 여학생은 총에 맞아 비틀거리자 경찰관들은 이 여학생을 방망이로 구타하여 거의 절명케 하여 시궁창에 밀어 넣어버렸는데 뒤에 근처의 시민들이 끌어내어 치료하여 겨우 생명은 건질 수 있을 듯하고』, 『성남동파출소에서는 어떤 삼십세 식모를 벗겨놓고 둔부를 방망이로 구타한 만행을 자행하였다』는 이야기. 긴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를 계속한 박의원은 『마산에서는 배급주는 식량도 받지 않으려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동방예의지국의 경찰이 그렇게 흉악한 인간 이하의 만행을 하다니 하늘과 땅이 두렵지 않은가. [출처: 동아일보 l 1960년 3월 26일]
김주열 열사 사건 진상규명
◇ 마산(馬山)에서 한성관(韓聖寬)· 강인환(姜仁煥) 부산분실기자발(釜山分室記者發)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를 해부 집도한 3명의 의사 중 김외과(金外科) 김병국(金炳國)씨와 구외과(具外科) 구봉해(具奉海)씨는 17일 하오에 열린 국회조사단 증언에서 해부 결과로 본 김(金)군의 사인은 철판이 박힌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 같다고 증언하면서 김(金)군의 시체에 나타난 좌측 머리의 박탈 흔적과 배후에 나타난 수 개 처의 찰과상은 사후에 당한 상처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와 반대로 이날 자진 증언대에 나선 박충모(朴忠模) 민(民)의원은 의사의 자격으로서 전기 2명의 의사 증언과는 달리김(金)군의 시체에 나타난 두부의 박탈과 배후의 찰과상 등은 사후의 상처라고는 볼 수 없고 사전에 당한 상처인 것이 분명하다고 오랜 의사의 경험을 토대로 과학적인 설명으로서 증언하여 주목을 끌었다.
[출처 : 동아일보 | 1960.04.19]
※ 마산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경남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인 민주화 운동으로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